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비아 드루실라 (문단 편집) === 출신 가문 === 본가와 양가 모두 로마에서 엄청난 명문 귀족 가문이었으며, 외가 역시 플레비스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평민 귀족 가문이었다. 양가이자 법적 출신 가문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쪽을 보면, 양할아버지는 로마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 번 이상 들어봤을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였다. 그는 [[동맹시 전쟁]] 직전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개방하자는 법안을 내놓았다가 자택 근처에서 과격파들에게 살해당한 [[호민관]]이었다. 그런데 양할아버지의 아버지(리비아의 양증조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크게 반대한 골수 원로원파 핵심 의원으로 상당히 유명했다. 참고로 양할아버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생질은 [[세르빌리아]]([[카이사르]]의 정부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레피두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장모였다.), 소 [[카토]] 등이었는데, 리비아의 아버지와 법적으로 사촌 관계인 소 카토 역시 공화주의자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혈통적 본가는 그 유명한 로마 최고의 파트리키 가문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 최고로 자타가 인정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었다. 리비아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는 영아기때 아들이 없었던 리비아의 양할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돼 리비우스 드루수스가문에서 자랐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자신의 양할아버지 대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판박이일 정도로 비슷했다. 그는 기원전 50년 법무관 외의 선출직 고위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상당한 부자였고 [[키케로]] 등과 친분을 나누었던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진군 직후 동료 원로원파 인사들과 함께 그리스로 건너갔으며, [[필리피 전투]] 후 [[아우구스투스|훗날 사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삼두군에게 항복을 거부하다가 체포 직전 공화정 수호를 외치며 자결했다.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는 슬하에 아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딸 리비아 프리마, 리비아 드루실라가 있었다. 헌데 리비아 드루실라의 오빠로 클라우디아누스의 아들인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결혼 후 두 딸(리비아 풀크라, 리비아 리빌라)만 있고 필리피 전투 직전 혹은 전투 중 함께 죽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차남을 양자로 입적시켜, 키웠다. 그가 바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동생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본가와 양부의 가문 모두 원로원파였지만, 양누나 리비아의 남편인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다. 그는 집정관까지 역임했고, 아우구스투스 치세때 황제가 선정한 사제, 올림픽 집행위원 등에 올랐다. 그의 친고모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를 낳은 [[스크리보니아]]였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